[독후감] ‘리더를 위한 한자 인문학’을 읽고 신예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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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나무 / 네팔 가지 / 신예린(11학년) ![]() 첫 번째, 희락과 거울 감(鑑). 감(鑑)은 ‘살필 감(監)+쇠 금(金)’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살필 감(監)은 무릎을 꿇은 사람(人)이 눈을 아래로 깔고(臣) 물(一)을 수평으로 담아놓은 그릇(皿)에 자신을 비춰보는 모습을 본뜬 글자로, 그가 더해진 거울 감(鑑)은 거울이라는 도구를 넘어 행위, 즉 ‘거울을 보다’, ‘자기 모습을 비춰봄으로써 반성하고 경계한다’는 수신(修身)의 상징성을 담고 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에, 결점이 없을 수 없는 부족함 투성이이기에 끊임없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피드백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거울이 어떤 거울이든, 금 거울이든 은 거울이든 나무 거울이든 질 거울이든, 우리의 ‘거울 감’을 이루는 부수가 어떤 속성이든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바라보는 거울 속에 ㅎ나님께서 기뻐하실 나의 모습이 담겨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되는 것이다. 언제나 좋으신 ㅎ나님의 희락을 거울 삼아 나의 지금 모습이 ㅎ나님께서 정녕 기뻐 받으실 나인지, 내가 오늘 한 일이 ㅎ나님께서 정말로 기뻐 받으실 만한 것이었는지 항상 성찰하고 또 나를 점검하자. 두 번째, 오래 참음과 공부(工夫). 여기서 말하는 공부(工夫)란 훌륭한 사람(夫)을 만드는(工) 수련 과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공부의 목적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이와 거의 상반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전에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만방에서 학생들이 하는 것은 얼핏 보면 자기계발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우리가 하는 것은 결코 자기계발이 아니라 ㅎ나님께서 ㅎ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실 그저 수많은 도구들 중 하나로 쓰임 받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그래서인지 공부(工夫)의 공(工)은 도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영어로 공부를 뜻하는 ‘study’는 ‘자신을 ~에 헌신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동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공부는 스스로를 ㅎ나님 나라에 헌신하겠다는 결단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게 나누어주기 위해, 궁극적으로는 ㅎ나님의 꿈을 이루어 내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공부한다. 그게 곧 예배로 드리는 공부이다. ‘눈물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나의 부족함을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오래 참으며 메워 나가자. ㅎ나님의 선하신 길을 따라가고자 하는 그 소명 하나 가지고 지금 내가 마땅히 참아내야 할 것을 오래 참아 보자. 세 번째, 온유와 물 수(水). 물 수(水)는 물이 흘러가는 모양의 상형으로, 가운데 큰 물줄기가 흐르고 양쪽으로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모습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운데 큰 물줄기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해 주시는 ㅎ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사랑과 ㅂ음을 흘려보내는 작은 물줄기라고도 볼 수 있다. 도덕경에서는 ‘머물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 마음 쓸 때는 물처럼 그윽함을 좋게 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물처럼 어짊을 좋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믿음을 좋게 하고, 다스릴 때는 물처럼 바르게 하고, 일할 때는 물처럼 능하게 하고, 움직일 때는 물처럼 때를 좋게 하라’고 했다. 우리는 모든 생물에게 두루 미치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 같은 물을 닮아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요소가 아닌 이롭게 하는 꼭 필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또 선두를 다투지 않는 흐르는 물의 조화를 본받아야 한다. 웅덩이를 만나면 다 채우고 난 다음 포용하며 흘러가는, 서로의 때를 기다리고 존중해 경쟁이 아닌 동역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근원, 즉 목적성과 정체성이 있는 원천(原泉)이 되어야 한다. 뜨거운 여름철 잠깐 소나기가 내려 도랑에 고여 해만 뜨면 금세 말라버리는 근원 없는 물이 아니라, 용솟음쳐 쉼 없이 흘러내리다 우묵한 곳을 만나면 그곳을 채우고 또다시 흐르는 원천이 돼야 한다. 하지만 물의 핵심 역량은 생명을 살리고, 그러기 위해 아래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겸손함이라고 한다. 물은 늘 아래로 흘러서,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 소외된 곳으로 흐르는 겸손함을 가진다. 그래서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고, 이처럼 부드럽고 온유한 물이 결국 강한 것을 이기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절제와 소통(疏通), 그리고 쉴 휴(休). 소통하려면 기본적으로 나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의도보다 내 생각을 점검하고 상대의 의중을 알아보려는 마음이 앞서야 하며, 나를 비우고 상대의 마음을 담으려 해야 한다. 상대의 마음에 길을 놓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요, 백 마디 말을 해봐야 내 입만 아프다고 한다. 소통은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라도 더 절제하고 너의 한 마디라도 더 귀담아 마음 담아 경청하려는 태도 그뿐이다. ㅎ나님과의 소통 가운데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나열하고 있진 않은지, 반대로 오늘도 나의 그런 길고 긴 이야기들이 저물기를 기다리며 당신께서 또 한 번 내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를 작은 내가 귀 기울여 듣고자 하는지 돌아보고 절제해야 한다. 그에 더불어 사람(人)이 나무(木) 밑에서 쉬는 모습의 쉴 휴(休) 또한 절제를 논한다. ‘ㅇ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ㅇ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ㅎ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내가 아무리 전심전력으로 매일을 발버둥 치며 살아가고 있더라도 ㅎ나님께서 문을 열어두시지 않으셨다면 그건 모두 헛된 것들에 불과하다. 내 발걸음이 ㅎ나님께로 향한 길을 걷고 있는지, 나의 첫 단추가 ㅎ나님인지, 또 내가 바라는 끝 단추도 ㅎ나님의 것인지 돌아보자.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ㅅ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인하여 충만해져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마음밭에 열린 열매들을 혼자 누리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각자의 부르심받은 방식과 사명대로 이 세대를 세워 일으켜야 한다. 잔잔한 ㅅ령의 온기로 얼어붙은 이 세대를 잠잠하게 녹여내는 우리가 되자.\ |